인간의 조건
Publish date: 2013-07-29Tags: 시사 양극화 노동 한국사회 취업
(이미지 출처 Yes24)
감상
- ‘노동의 배신'의 우리나라 판이라고도 불릴만하지만,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냉철한 잠입취재 보도를 했다면, 한승태는 개인의 경험을 씁쓸발랄(?)한 문학작품으로 풀어냈다.
- 우리 주변의 이야기라서 공감, 미안함, 분노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 감정마저도 내가 느낄만한 자격이 있을지도 확신이 안 간다. 불편한 마음이라도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 인터뷰
- 2012-12-29 한국일보 저자와 차 한 잔-‘인간의 조건’ 쓴 한승태씨,
- 2013-04-30 김민식 PD 블로그 ‘인간의 조건’ 저자 한승태를 만나다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것은 24시간 근무 같아요. 감정 노동이 더 힘들거든요. 일할 때 겪은 괴로움이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나서 하루 종일 일하는 것처럼 힘들어요. 돼지 똥을 푸는 건 억울하진 않거든요. 그건 그냥 일이니까요. 하지만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일하다 손님에게 모욕을 받으면 그건 계속 머리에 남아요. 앙갚음할 수도 없으면서 분한 마음만 남아있으니 계속 집에 와서도 그 생각만 붙들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편의점 알바에겐 자유시간이 없는 셈이죠. 똥꾼은 근무시간이 끝나면 일은 끝나거든요. 점원에게 화를 내는 고객도 밖에선 점잖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다들 화가 많아 어딘가로 분출하고 싶은데 가게에서 자신이 내는 돈에는 누군가에게 화를 낼 권리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상깊은 단락
p7~8
스티븐킹은 자신이 호러에 집착하는 이유를 ‘깊은 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침대 밑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충동’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경우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 너머를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충동'쯤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p111
그는 충북에서 상경해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대기업 부장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그 역시 자기 확신과 자기 자랑이 심했다.
p112
카운터 옆에는 고물 컴퓨터가 한 대 설치되어 있었다.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를 왜 놔뒀을까 궁금했는데, 점장의 것이였다. 그는 “LG에 다니던 시절 작성하던 논문을 계속 손보는 중"리아며 한글 파일을 열어 보여주곤 했다. 그의 의도가 진정한 연구라기보다는 일종의 자기 과시 효과임이 뻔해 보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켤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런 편의점 사장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p173
5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내 체내에 축적되어 있던 화를 배출시키는 통로나 다름없었다. 이 일은 우울한 경험이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내 세계는 단순했다. 나는 이름 없는 순교자였고 손님은 합법적인 악마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란 존재는 순교자인 동시에 박해자이기도 했다. 나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p234
조롱을 감수하면서 맞지 않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보기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은 황소 심줄 같은 끈기를 지닌 사람들이다. 참고 참아서 끝내는 어디선가 한자리 꿰차는 사람들. 그러니 너희들도 인생의 절반을 무의미한 일을 하며 살라고 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중도 포기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라 해야겠다. 참을성 좋은 사람들은 체면이니, 부모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분에 충성을 다하는데,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건 여지없이 이런 부류다.
p237~238
지금이 21세기라고 해도 모두가 화상 통화를 하고 제트백을 메고 출근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IMF 시절을 살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서울 올림픽 시대의 삶을 산다. 삶의 스펙트럼 전체를 살펴본다면 얼마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동시대적인’ 생활 수준을 누리는지 확인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p388
많은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이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면서 돈만 밝힌다고 투덜댔다. 이런 평가는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힘들고 돈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작업장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닌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왜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힘들고 위험하고 보수도 적은 일을 참고 버티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걸까? 누군가 그런 일을 그만둔다면 그건 그들이 참을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현명하고 이성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p437
나는 자동차 공장 직원들이 확인 도장 찍던 모습을 기억한다. 이것이 강한 인상을 남긴 이유는 바로 그 마무리 도장 찍기가 그들의 성식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도장은 아무렇게나 찍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잉크 자국이 뭉쳐있던 번져 있던 부품 성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마치 서예가가 낙관을 남기듯 OK 사인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그에 들인 노력과 섬세함의 2배, 3배, 4배를 실제 가공, 조립 작업에 쏟아부었다. 버는 말끔하게 제거했고, 작은 칩 찌꺼기나 물방울을 깨끗이 닦아내지 않고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p437 ~ 438
comments powered by Disqus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터도 불법 파업 때문에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불법 정상화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 뿐이다. 일부 사람들은 백혈구가 병균을 공격하듯 노동조합을 비난하지만 어느 쪽이 병들어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