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
Publish date: 2020-01-08Tags: 종교
Table of contents
감상
2020.01.08
초판 이후 거의 20년만에 다시 읽었다. 여전히 많은 여운이 남는다. 나는 종교가 없어서 종교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종교가 있는 분들과 없는 분들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는 확신이 든다.
언급된 도서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A History of God
- A God: Biography
- 새로 만난 하나님 (원서 : The God We Never Knew, Marcus J. Borg)
- 기독교의 심장
- 세월호 앞에서 종교를 다시 생각하다. (불교평론 60호)
-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p240)
- 예수 처음으로 다시 만나다. (p269)
- 또 다른 예수 (p290)
-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p290)
- 믿음을 넘어서- 도마의 비밀 복음서 (p290)
- Jesus For The Non-Religious (p287)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p292)
-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p304)
- 예수와 또 다른 이름들 (p305)
- 오강남의 그리스토 이야기 (p335)
-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p353)
인상 깊은 단락 (개정판)
p39
그러나 특수한 시대적 배경과 요구에서 형성된 특수 교리를 진리 자체로 여기고, 여건이 완전히 바뀐 오늘에도 이런 특수 교리를 문자대로 붙들고 있어야 참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데는 문제가 있다.
p72
한편 동양에서 이분법적 사고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대표는 인간사를 모두 선과 악, 빛과 어둠, 나와 원수 간의 쟁투로만 보는 고전주의적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사람, 그리고 기독교의 이원론적 역사관을 그대로 받아 역사와 사회를 착취자와 피착취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 사이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전통 마르크스 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 (지금까지의 남북한은 그런 의미에서 다같이 이원론적 병을 앓고 있었던 한통속이였다 할 수 있다.)
p94
그럴 수 있을 때, 신의 걸작인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일은 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자리자'에 칼을 들고 대드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닿게 될 것이다.
창조론이 진리라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신이 손수 지으신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연 파괴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진화론을 믿지만 일회용 볼펜이나 종이 수건 쓰기도 거부하면서 자연보호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는 캐나다의 데이비드 스즈키 교수, 누가 창조주의 정신에 더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겠는가?
이어서 박노자가 쓴 오슬로 시내의 이야기
p106
이야기의 역사적 과학적 가능성을 따지는 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는 대신 조용히 그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주려는 더 깊은 뜻이 무엇인가 헤아려보고 거기서 얻을 교훈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믿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대로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여야 할 필요는 없다(No need to think the Bible must be literally true to be true)”
p147
그러나 금속이나 나무로 된 것만 우상이 아니다. ‘신은 남성이다'하는 식으로 우리 머리 속에 단단히 새겨진 형상도 그 상징적 성격이 망각될 때 역시 우상이 된다.
153
절대적인 신을 상정한다면 신이 여럿일 수가 없다.
그럼 알라 신이나 상제나 하늘님은 누구인가? 기독교인으로서 유일신관에 투철하다면, 이런 신들은 한 신에 대한 각이한 견해(view), 생각(idea), 표현(expressios), 관념(concepts)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이 따로 있고 다른 종교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궁극 실재에 대해 각각의 종교가 각각 다르고 생각하고, 각각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먼 산을 놓고 각기 자기들의 지리적 위치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리 보고 다른 이름, 다른 표현을 붙이는 것과 비슷하다.
p168
이런 특수한 고대 부족신관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신관 중 하나이다.
p169
신관의 변천사를 다룬 책 소개
p170
이처럼 어느 메타포이든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틀린 말이 되고 상징적으로 이해하면 맞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신에 대해 메타포를 쓸 때 그 상징성을 망각하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p174
율법주의적 신관, 율법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살면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해야 된다,’ ‘하면 안 된다'의 차원으로 떨어지고 만다. 믿음이라는 것이 큰 부담이 된다. 종교적 삶이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게 된다.
p192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특수한 정신적 분위기나 환경 때문에 아직 정신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 그런 사람에게는 ‘사탕/꿈밤’ 신관이 필요하고, 또 그런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간직해야 할 유일한 신관으로 고집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p193
1960년대의 ‘신은 죽었다'와 요즘의 ‘신은 실업자’
p213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인 빌 핍스 복사의 인터뷰. 예수의 부활을 과학적 사실로는 믿지 않고,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고 함.
p214
핍스 : 제가 보기에 성경 이야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진리가 있다면 그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을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조건 없는 사랑의 일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 예수님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p222
최근 신학계의 동향은,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보다는 ‘예수님의 믿음(faith of Jesus)‘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이런저런 교리나 이론을 무조건 믿기보다는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마음을 알고 우리도 그런 믿음,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숭배하기 전에 그의 신앙이 어떠했던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p225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신앙의 눈으로 읽어야지, 역사적인 이야기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결코 역사적 사실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p227
-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 탄생 연대가 헤롯 왕이 죽은 기원전 4년 이전이고, ‘누가복음'에 의하면 호구조사를 명한 구레뇨가 총독이 된 기원후 6년 이후 이야기가 된다.
p228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보통적 탄생 이야기는 고대 영웅 신화에서 영웅의 위대함을 묘사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하나의 신화적 화법, 혹은 문법이였다.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을 했기 때문에 위대한 분이 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p236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 성령을 체험했다. 이 놀라운 체험을 어떻게든지 의미 있게 포현하여 다른 사람도 그 체험에 참여하게 되길 원했다.
물론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윤유적인 의미로 그냥 ‘위대한 분'이라는 뜻이지 그리스 사람이 생각하듯 본체적으로(ontologically) 하나님과 ‘본성'에서 같다는 뜻이 아니었다.
복음서먀다의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시점 차이
- 마가복음 : 그가 세례를 받을 때 (기원후 65~70년경 쓰임)
- 마태복음/누가복음 : 출생시점 (마가 후 15~20년 후)
- 요한복음 : 출생 이전 (기원후 90~95년)
p241에서도 설명
p237
특히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교회의 중심 교리가 될 정도로 강조된 동정녀 설은 성을 원죄와 연결해서 보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p239
이처럼 예수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 관념이나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결국 기독교를 반대한다거나 교회를 헐뜯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는 마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 시책에 의문을 제기하면 무조건 나라를 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몰던 논리와 비슷하다.
p245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의 경우 창시자 무함마드를 절대 신격화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포함하여 어느 인물이든 그를 인간 이상으로 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shirk)‘를 범하는 것이라 본다.
p242
‘마가복음'에서는 인간 예수가 신이 되었다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신이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처럼 성서 4복음서에서마저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각각 달랐다는 것이다.
p248
세례 요한은 복음서에서는 물론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 그의 신들메도 매기에 합당하지 아니한 자로 나와 있지만, 성서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p249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같은 예수 연구가는, 당시 그 지방에서 실제로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사람이 3퍼센트 미만이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실질적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주장도 하지만 확실히는 모르는 일이다.
p250
영어권 예수 연구가는 이를 ‘subversive(체제 전보적)‘하다고 표현한다.
p257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서 스페인계와 아메리카 인디언계의 혼혈인 메스티소들을 위해 목회하고 있는 비르힐리오 엘리손도(Virgilio Elizondo) 신부의 말처럼 “각 세대는 자기들이 당면한 가장 깊은 추구에 부응해서 자기의 예수상을 형성하게 된다…. 그들이 예수하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p261
예를 들어 조선시대 한반도에 예수님이, 혹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미를 심어준 분이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그는 무슨 도사라던가, 미룩불이라든가, 정도령이라든가, 보살이라든가,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현신이라든가, 후천개벽을 위한 한울님의 사신이든가, 천지 공사를 위한 상제의 현현이라는 등의 개념으로 설명되었으리라 추리할 수 있다.
p274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을 따른다면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가 의로우냐, 불의하냐를 따지면서 계속 이런저런 울타리나 담을 쌓는 일을 그만두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교인이냐 아니냐 하며 구별하는 울타리를 헐어야 한다.
p288
기원후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도마 복음
p291
성서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신약성서에서 누군가의 ‘제자(disciple)‘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와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p296
이렇든 숭고한 작업, 하나님의 일은 인습적, 통속적 이해관계에 얽매인 기득권 세력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분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실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죽음과 부활의 신비다.
p303
자기가 거기서 태어나서 그 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 종교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백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조건 백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미국 남부 지방 KKK 단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차별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다.
p306
1962년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 요한 23세, ‘타 종교에 대한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
찾아보니 그 이후로는 공의회가 현재까지 없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B%B0%94%ED%8B%B0%EC%B9%B8_%EA%B3%B5%EC%9D%98%ED%9A%8C )
p317
한국의 예에서 보듯이, 이런 지적, 영적, 도덕적 성장을 막는 교회가 아무리 켜져서 아무리 많은 수의 교인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그 많은 수의 교인 때문에 한국 사회가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사회로 탈바꿈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 하는 거은 거의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믿어서 혼자 잘살게 될것으로 착각하고, 잘 믿어서 자기들만 청당 갈 것으로 꿈꾸는 사람 때문에 더욱 극심한 물질 중심주의, 이기주의, 과시 제일주의의 사고방식이 팽배해지는 것이 현실 아닌가?
p318
교회의 성공을 교인의 머릿수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인 짓이다. 초등학교 학생 수가 대학원 학생 수보다 많다고 하여 초등학교가 대학원보다 더 성공적이고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공한 교회, 잘되는 교회를 오로지 사람 머릿수로만 보는 것은 천박한 물질주의적 가치에 입각한 상업적 발상이다.
p320
절대적인 확신과 독단은 무지한자의 특권이다.
p321
이렇게 자기가 진리를 찾았다, 소유하고 있다면서 겁도 없이 떠들고 다니는 사실 자체가 진리에 대해 그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웅변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p326
성녀 라비아의 기도
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김이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면 저를 지옥에서 불살라주옵시고, 낙원의 소망 때문이라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 주옵서서 …
p330
마태복음 28장 19절(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은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기독된 신양성서 사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문구임.
p333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이웃이, 그리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나도 분담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p334 ~ 335
하나님의 나라 건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정의와 질서와 평등이라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실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들어갈 대상'이 아니라 ‘구할’ 대상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이 땅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비는 것이다.
p339
여기서 우리말로 ‘회개'라고 번역된 말의 그리스어 원문은 ‘메타노이아(metanoia)‘다.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 정도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중략)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의 가르침은 천국의 건설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 속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340
우리 스스로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건설한 나라는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가장 큰 이유도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은 채 제도와 체제만 바꾸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342
comments powered by Disqus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의, 도덕적 쇠퇴, 생태계 파괴 등 현재 인류가 당명한 여러 위기 앞에서, 모든 종교가 서로 자기만 옮다는 독선적 아집이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인류와 함께 공멸하고 말 것이므로, 각 종교는 서로 협력하여 이런 난국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