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Publish date: 1995-10-20
Tags: 소설

감상

2023.07.10

고향집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소설의 배경은 1968년부터 1986년까지, 책이 출판된 해는 1988년이다. 누나나 형이 샀으리라 짐작되는 이 책을 책장에서 발견하고 내가 읽은 시기는 1995년에서 1997년 사이로 짐작된다. 오래되어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꽤 무서운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망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공포감이 어린 나이에는 더 크게 느껴졌던 듯하다. 대학 때 친구가 이상형을 물었을 때 ‘고가품에 대한 선호도가 과하지 않은 여자'라고 말했던 기억도 있는데, 이 책의 여파였을 듯하다.

어제 본 영화 ‘엘리멘탈'과 반대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누렇게 변한 책을 띄엄띄엄 넘겨가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머리 속에 올려보니 어릴 때보다는 무덤덤하게 느껴진다. ‘사치스럽게 살면 망한다'는 단순한 교훈을 새기면서 넘어가면 되겠다 싶다.

인상 깊은 단락

p16

그게 시작이었다. 그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욕구는 내 짐작이상으로 컷던 듯 그로부터 그는 거의 네 시간 가까이나 한 번 진득하게 생각을 가다듬어 보는 법조차 없이 기나긴 얘기를 시작했다. 그 들의 쓸쓸한 사랑과 그 현란한 추락을. 시대의 후미진 하늘 모퉁이를 우리가 알 수 없는 찬연한 빛으로 불타여 져간 한 쌍의 젊음을.

p76

고통과 쾌락이 인간에게 주는 자극은, 똑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피상적인 관찰일지는 몰라도, 극단의 곹옹을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과 극단의 쾌락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표정은 매우 닮아 있다.

p183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야. 벌써 마음을 결정해서 이대로 모든 걸 끝내겠다면 모르지만, 그렇잖음 이게 내 진실을 은폐나 왜곡 없이 바로 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다른 결정이 나서 우리 사이가 더욱 떼어 놓기 어렵게 발전한 뒤에는 설령 네가 물어도 바른 대답을 얻기 어려울 거야. 그때는 그걸 지키려는 내 계산이 틀림엇ㅂ이 과거를 미화하거나 조작해 네게 들려줄 테니까. 아무런 계산없이 냉정해져 있는 이때 모든 걸 알아 둬.”

p296

윤주의 마지막 말

“그래 …… 됐어 …… 실은 나도 하루하루 꺼져가는 촛불 같은 우리 삶을 …… 망연히 보고 있기가 괴로웠어…… 그런데 …… 그런데 말이야…… 바보 같이 너는 왜 …… 일찌감치 내개서 달아나지 않았어? 그렇게도 여러 번 …… 기회를 주었더랬는데 …… 이렇게 함께 추락하는 게 안스러워……”

p297

… 임형빈이 얘기 도중에 인용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구만이 휑한 머리속을 떠다닐 뿐이었다.

—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